에밀리조차 되지 못한 이후에 _ 소설《순례 주택》

에밀리조차 되지 못한 이후에 _ 소설《순례 주택》
이미지 출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공식 스틸컷 © 20th Century Fox

 

커피는 꼭 스타벅스 걸로, 누구나 이름을 알 만한 명품 가방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고 꿈꿨던 멋진 ‘커리어우먼’의 모습은 이러했다. 현실은 물론 영화 속에서도 허영심으로 매도되었던, 성공을 향한 여성들의 욕망이 매력적이었다.

 

개봉하고 20년이 지나서 다시 보니 내 사회 초년생 시절 지녔던 건방진 모습이 ‘앤디’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담겨 있어 이불을 찼다. 업계 선배들이 쌓아온 노력이 우스워 보이고, 나는 다르다고 외치던 그 오만함. 이제는 웃으며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시금 쓴맛이 뒤따랐다. 후배 하나를 끼고 가르칠 수 있는 ‘에밀리’ 정도의 선배가 되어 있을 거라 믿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이미지 출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공식 스틸컷 © 20th Century Fox

 

가정의달은 나에게 괴리감을 주는 요소 중 하나다. 쉬는 날 하나 없는 4월을 지나, 5월은 달력 위 빨간 글씨가 주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섰던 번화가에는 아이들을 위한 행사가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열심히 참여하는 아이들의 몸짓이 귀여웠다. 딱 그 정도 감상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와 달리, 엄마의 발걸음이 자꾸 멈췄다. 그 머무름 속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나는 외면했다.

 

에밀리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엄마의 삶을 살겠다는 건 아니었다. 동창이었던 엄마와 아빠는 고등학교 진학부터 길이 달라졌다. 회사에서 승진을 바라고 자기 사업체를 꾸려 나가는 삶을 당연하게 꿈꾸는 아빠와 직장 생활은 결혼으로 끝나고 노동의 강도에 비해 보상이 적은 ‘아르바이트’로 자녀 용돈을 채워주는 엄마의 삶. 운영하던 가게는 가장의 사업 밑천이 되는 게 당연했던 삶.

 

나는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시집가기 좋은’ 여대에 가라는 말을 외면했다. 그러니 “나는 다르게 살게.”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20대를 지나, 그저 평범한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이 모습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누구에게 이해를 바라겠는가. 나는 에밀리를 거쳐 ‘미란다’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삶의 모양은 두 가지뿐이었다. 화려하거나 숭고한 희생이거나. 그 외에 제3의 삶은 없는 걸까. 20대, 30대, 40대에 정해진 삶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노년까지 증명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걸까. 미란다는커녕 에밀리조차 되지 못하고 엄마의 삶은 거부한 나는 어떤 노년을 그릴 수 있는가. 소설 『순례 주택』의 ‘순례 씨’는 그 두 가지 바깥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70대 할머니 순례 씨는 노동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고리대금을 하며 검은돈을 벌었던 남편과 이혼한 후, 세신사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다. 45세쯤엔 1층 양옥집을 샀는데, 이후 주변 개발로 자산 가치가 올랐고 도로 확장 보상금을 더하여 4층 다가구 주택 ‘순례 주택’을 건설했다.

 

순례 씨는 마치 1층 양옥집 정도만 본인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주변 시세에 맞추지 않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임대료를 받았다. 자기가 번 돈이 아니라 벌어서 쓴 것만 자기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전남편의 검은돈을 선택한 아들에게 순례 주택을 상속하지 않는다. 자기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물려줘야 한다는 통념과 달랐다.

 

순례 씨는 자신의 부를 또 다른 부로 쌓아 올리는 대신 타인의 자립을 돕는 ‘선배’로 남는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희생으로만 설명되지도 않는 삶.

 

순례 씨의 평범한 순례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붙잡고 있던 ‘의무’가 조금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알고 있던 길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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