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세상을 다스리려 할 때 _ 영화《오디세이》
※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오디세이》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방송사에서 취재 나온 기자가 다가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유물이 전시된다는 소식에, ‘무도 키즈’ 이전 ‘홍은영 키즈’였던 또래 아이들이 현장을 가득 채웠다. 엄마는 등을 떠밀며 말했다. “신간 나올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갔어요. 얘는 모르는 게 없으니 물어보세요.” 나는 부끄러워 도망쳤다. 다른 아이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는데, 정작 뉴스엔 그 아이도 송출되지 않았다. TV 매체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던 시절, 그 애도 나도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을 테다.
새천년을 맞아 당시 한국 사회에 필요한 새롭고 희망적인 콘텐츠가 ‘신화’라는 생각으로 기획된 만화 시리즈였다. 어른이 되어 같은 이유로 신화가 필요한 나에게 영화 《오디세이》를 관람하는 건 당연했다.
무려 ‘용아맥 중블’에 성공했다. 내 자리는 가장 뒷줄 끝자리였다. 나만의 ‘로열석’이었다. 언젠가부턴 사람들로 둘러싸이는 게 과하게 답답하고 불편했다. 곁에 사람이 없는 게 나에게도 옆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옆 사람이 산만하면 더 좋았다. 남에게 짜증이 나는 건 견딜 수 있어도 미안한 일을 만들기는 싫었으니, 서로의 부산스러움이 차라리 달가웠다.
예고편조차 보지 않는 강박도 생겼다. 온라인 세상엔 ‘스포일러’가 난무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김새기 다반사였다. 절대 검색하지 않고, 절대 무언가 알고 가지 않겠다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인데도 강박은 심해졌다. 사실, ‘절대’ 통제할 수 없어서 생긴 강박이 아니었을까. 종종 생각한다.

알고 보니 나는 ‘오디세이’와 ‘오디세우스’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아예 몰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자극적인 장면들에 깜짝 놀랐다. 마치 어린이용으로 정제된 책만 읽다가 ‘그로신’을 처음 알게 된 순간처럼 느껴졌다. 어쨌거나 전쟁은 ‘인간 세상’의 일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인간의 무기로 이길 수 없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이상했다. 분명 그 무자비함이 두려웠는데, 되려 긴장이 풀렸다. 감각 과부하가 일시에 해제된 것처럼 편안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발생한 문제는 모두 신의 탓이었고 해결책도 단순했다.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빌고, 바라는 게 있다면 기원하면 됐다. 10년의 트로이 전쟁과 이후 10년의 표류 역시 신들의 농간과 분노 때문이었으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저 신의 변덕일 뿐이었다.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감히 신의 힘을 이겨내려는 오만한 존재로 묘사된다. 전쟁의 신 ‘아테나’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지략만을 믿었다. 사냥에서조차 신의를 지키겠다던 오디세우스의 신념은 ‘트로이 목마’의 속임수 앞에서 무너졌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의 근간이었던 ‘제우스의 법’에 따르면 방문자의 행색이 어떻든 환대해야 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수시로 깨졌다. 무장한 군사들이 두려워 대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약자를 약탈하고 강간을 일삼았다. 오디세우스는 그저 외면했다. 괴로웠던 그는 은연중에 귀향길을 피했고, 기억을 지우는 꽃 ‘로터스’를 기껍게 먹었다.
그를 사랑했던 신 ‘칼립소’는 말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라고. 싸우려 하지 말고, 맞서려 하지 말고, 그저 포세이돈의 바다에 몸을 던지라고.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일련의 사건을 직시한다. 작은 뗏목으로 거대한 바다에 나간다. 그제야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신을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영원히 약속된 평화를 깨고 불투명한 미지의 불행으로 나아가는 것, 이 또한 가장 인간다운 선택이다.
영화는 오디세우스가 멋지게 귀향해 단번에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영웅 서사로 각색하는 대신, 관객의 기대를 일부러 깨뜨린다.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을 악용한 그들을 직접 보고 나서, 왕비 페넬로페에게 진심을 토로한다. 과연 그에게 닥쳤던 시련은 신이 준 형벌이었을까, 스스로 만들어낸 제약이었을까. 그가 내내 따르던 ‘아테나’가 실은 트로이에서 이유 없이 죽은 민간인의 환영이었던 것으로 감독은 대답한다. 오디세우스는 그러고도 다시 한번 제우스의 법을 이용한다. 불의를 처단하기 위해 정의를 이용하는 방식은 트로이에서와 변함이 없다. 영화는 그가 죽은 부하들을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 왕좌를 내려놓고 페넬로페와 미지의 땅 서쪽으로 향할 때 비로소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엄마가 ‘절대’라는 말을 쓰면 단단히 혼내셨다고 했다. 인생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며. 섣불리 인생을 재단하겠단 어리석음을 지적했던 것일 테다. 나는 영화관 민폐를 욕했다. 인터넷에 어떤 스포일러 주의도 없이 글을 쓰는 사람에 실망했다. 내가 베푸는 선의를 깨뜨리는 사람들이 미웠고, 호혜로 굴러가던 세상은 끝났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일상의 변수를 견디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잃은 건 나였다. 신도 아닌 내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한 셈이다.
깨닫고도 잘못을 반복하는 오디세우스는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거스를 수 없는 풍랑에 몸을 맡기고,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 스스로 무너뜨린 신념을 다시 세운 것 또한, 오직 인간 오디세우스 자신이었으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