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자의 관심사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자의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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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OPE>를 보다가 문득, 스크린 안에서 무섭게 질주하는, 마베이요라는 이름을 가진 저 외계인이 모두를 죽여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극장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나를 포함해서.
옆에 앉은 여자는 놀랄 때마다 몸을 뒤로 세게 기대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양한 자극이 몰려오는 동안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 의문, 여자는 대체 왜 놀라는 것인가. 두 번째 의문, 왜 그때마다 진동을 같이 느껴야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놀라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4D 영화인가. 시각적 자극에, 진동에, 소리에, 후각적 자극까지. 극장에서 대체 뭘 먹고 있길래 입에서 마라맛 떡볶이 냄새가 나는 거냐, 정말. 진짜 총체적인 짜증 유발자였다.
인간이 이토록 짜증 나고 성가시고 무례한 존재라는 걸 그동안 깜빡했다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반 내내 실감했다. 영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가 떠올랐다. 타노스의 선택이 정말 옳았던 걸까. 성질은 나쁘고 피지컬은 좋은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굴 탓하겠나. 개봉일에, 만석일 게 뻔한 영화를 보겠다고 나선 내 잘못이지. 하긴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이 없었다면 맨정신 유지하고 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다.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걸 뻔히 알면서 인구밀도 높기로 유명한 서울에서 사는 나란 인간의 모순은 또 어떻고. 그러니 인간에 대한 혐오는 일찍이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한 것 아니었나 싶었다.

자기혐오는 내가 별수 없는 인간이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20대의 어느 날, 나는 그 쓰라린 사실을 핑계 삼아 앞으로는 생일을 혼자 보내기로 했다. 나란 인간의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짓이 유치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저에는 이토록 불완전한 존재를 축하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비틀린 항변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행지에 가거나 기념일에 사진을 찍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내 얼굴을 보는 게 힘든 것도 있었지만 사진이나 들여다보면서 즐거웠던 한때를 추억하는 것만큼 미련스러운 행동도 없다고 생각했다.
추억이 서린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애착이 있는 물건을 사 모으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그게 어디든, 내 흔적을 발견하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배경부터, 생이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라는 오래된 믿음. 어리니까 떨 수 있었던 건방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게 쿨하고 멋있는 어른의 태도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20대에, 화석처럼 굳어진 태도였다.

그런 나의 가장 치명적인 모순은, 이제 와 타인의 서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의 선 넘기를 참지 못하는 내가 어째서 구술 생애나 인터뷰처럼 내밀한 인간의 서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
인간의 본질에 관심이 많다고 한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교묘한 비틀기에 가까웠다. 다만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관심을 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모순을 직접 대면하는 게 두렵기에 그랬다. 타인의 모순을 거울삼아 내 안을 안전하게 들여다보려는, 비겁하고도 절박한 우회로, 그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었다.

잠시 공간을 침범한 타인의 얕은 진동에 지구 멸망까지 들먹이면서 나는 내 안의 오래된 진동을 어쩌지 못해 타인의 삶을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무겁고 끈적한 생애를 기록한다. 쿨한 척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뜨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인간에 대한 끈적끈적한 애증은 한 줌도 버리지 못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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