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의 용기는 조용하다.

4등의 용기는 조용하다.
ⓒ 작가명 : 박노해 / 전시명 : 박노해 사진展<산빛> / 출처 : 라 카페 갤러리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첫 만남 이후 일주일. 아이는 여전히 교실 구석에 앉아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기대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모여 앉는다.
아이는 말 대신 주변 눈치만 살핀다.

결국, 아이는 책상에 엎드린다. ‘역시 나는 안돼.’ ‘나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아이는 그렇게 스스로 자책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옆자리 아이가 말을 건다.
“화이트 좀 빌려줘.”
“어?어.”

당황한 아이는 화이트를 건넨다. 그리고 그게 전부다.
친구가 되는 사건도 아니고, 거창한 대화도 아니다. 그저 짧은 말 한마디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시작이다.

4등의 3월은 드라마와 다르다. 급격하게 친해지는 순간도,
갑자기 인기를 얻는 반전도 없다. 대신, 작고 어색한 순간들이 쌓인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누군가의 질문에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는 것.
성공도, 실패도 아닌 단순히 ‘해본 것’들이 모인 것 뿐이다.

이렇게 두려운 상황에 조금씩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점진적 노출’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과정은 등교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불안을 감소시키는 치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거창한 치료라기 보다는 ‘살아가는 것’이라고 부르고 싶다.

4등은 매일 조용한 용기를 낸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또는 시도하는 장소)에 가는 발걸음’ ‘외롭지만 혼자서 해 보는 경험’ ‘집에 돌아와 하루를 버틴 나에게 괜찮았다고 하는 혼잣말’
이 모든 것은 용기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용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 하루.
SNS에 올릴만한 순간도 없는 하루. 친구들에게 자랑할 일도 없는 그저 평범한 하루.
하지만 평범한 하루를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래서 나는 4등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 “오늘도 해냈네”라는 말을 꾸준히 해주고 싶다.
화려하지 않고, 성공이라고 부를 수 없어도 하루를 견뎌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내일도 여전히 혼자일 수 있다. 친구가 없을 수 있다.
그래도 다시 발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게 4등의 용기는 조용하다.
박수받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 조용한 용기가 모여서 3월을 만들고, 봄을 건넌다.

당신은 오늘 어떤 작은 용기를 냈나요?

<4등을 위한 글>

당신이 오늘 하루를 버텨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Read more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찬란하기를

20대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 사귀는 사람 있어. 근데, 여자야.” 동성애가 뭔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다. 내가 아는 한, 친구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고. 당시에는 범성애자니 무성애자니 하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보통 잘 알지 못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마련이지만 나는 “어, 그래?” 했다. 친구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내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By 윤명주 - 사적인 지각변동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

우리에게 가족은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집에서 삶을 나누는 사람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있겠지요.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부모님과 형제자매, 할머니와 할아버지처럼 촌수로 이어진 관계들이 있겠지요. 남편을 기준으로 하면  어머니,아버지, 그 위로 이어지는 할머니까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 아빠까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범위는 모두 같을까요?

By 이지선 - 햇살 좋은 창가
축제가 끝난 뒤

축제가 끝난 뒤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 체육대회가 끝난 운동장에는 종이 응원 도구 몇 개가 굴러다닌다. 하루 종일 울리던 음악은 멈췄고, 스피커에서는 잡음만 흐른다. 아이들은 하나둘 교문을 나선다. 반티 위에 겉옷을 걸치고, 친구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웃는다. “이 사진은 계속 봐도 웃겨” “내 표정 완전 이상해. 이거 반톡에 올린다.” 오늘은 분명 시끄럽고 즐거운

By 김지혜 - 4등을 위한 글
노트·수첩 : 思痕(사흔)

노트·수첩 : 思痕(사흔)

수첩은 밥이다. 나는 사랑하는 도구들에 밥이란 애칭을 붙인다. 적어야 살고 없으면 허기지는 그것.  누군가는 다 써버려야 사는 수첩을 나는 무지성으로 산다.  꽤 자주, 꽤 기꺼이.  반듯하고 단단한 하드커버를 보면 지나칠 수가 없다. 표지가 마음에 들면, 들춰서 내지를 확인한다.  가끔 당황할 때는 샘플도 없이 비닐로 꽁꽁 싸둔 노트를 발견했을 때다.  선이

By 서사이 - 도구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