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연필에 지우개를 달았나

누가 연필에 지우개를 달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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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연필은 늘 결핍의 상징이었다. 침을 묻혀 꾹꾹 눌러 써도 금방 닳아버리는 흑심(芯), 그 작은 손가락이 아릴 정도로 짧아지면 볼펜 깍지를 끼워 생명을 끝까지 연장하던 몽당연필. 기다란 국산 연필 한 자루도 호사였던 내게, 연필 뒤에 분홍색 모자를 쓰고 초록색 띠를 두른 ‘지우개 달린 연필’은 도구가 아니라 신분이었다. 그것은 지우개를 잃어버릴 걱정이 없는 아이들, 즉 ‘여유’를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1858년, 미국의 하이먼 리프먼이 연필 끝에 지우개를 심어 넣었다. 세상은 이를 혁신이라 불렀지만, 내 어린 세계에서 그 혁신은 차가운 우월감에 가까웠다.

1. 워커힐 아파트의 공주

명절날 아빠 손에 이끌려 찾아간 워커힐 아파트.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끼어 살던 내 눈에 한강변 언덕에 우뚝 솟은 그곳은 왕과 왕비가 사는 궁전으로 비쳤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한 살 터울 위인 언니의 방으로 쫓겨났다. 단둘만 남은 방 안에서 내 남루한 행색을 훑어내리던 언니는 궁전의 공주처럼 하얀 목폴라에 헤링본 원피스, 그리고 하얀 롱스타킹을 입고 있었다. 반면 무릎이 다 닳아 색이 바랜 골덴 바지에 소매 끝이 닳아빠진 보풀투성이 니트를 입은 내 꼴은 형편없었다. 나는 두 팔로 몸을 다 가리지 못해 낯빛을 붉혔다.

언니의 방은 우리 온 가족이 살던 단칸방보다 컸다. 태어나서 처음 본 ‘침대’라는 가구가 창가에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엔 시리즈별 전집류가 전리품처럼 나란히 꽂혀 있었다. 책장 끝, 정돈된 책상 위 연필꽂이에는 내가 평생 본 것보다 많은 연필이 빼곡했다. 그것도 지우개 달린 노란 연필. 우리 반 반장의 필통에서나 겨우 한두 자루 보았던, 짙은 개나리색 몸체에 초록색 띠를 두른 미제 연필-

딕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말이다.

내 빈곤한 욕망을 읽은 걸까. 언니는 깎은 흔적이 없는 새 연필 한 자루를 우아하게 집어 내밀었다.

-너, 이거 가질래?

그건 시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공주의 눈빛이었다. 어린 마음속에서 자존심과 욕망이 치열하게 싸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언니는 연필 두 자루를 더 뽑아 내밀었다.

-자, 이 정도면 됐지?

나를 낮게 굽어보는 그 손길을 뿌리쳐야 마땅했지만, 반짝이는 초록 테두리와 보송해 보이는 분홍색 지우개의 유혹은 너무나 강렬했다. 결국 나는 자존심을 억누르고 다 터서 희끗희끗한 손을 뻗었다. 경멸의 섬광이 스쳤으나 무시한 채 연필을 받아 들고 그 방을 뛰쳐나왔다.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은 묵직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져 어디론가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2. 지우개는 지우지 못했고

나는 세 자루의 연필을 다락방, 나만의 비밀 장소에 고이고이 숨겨두었다. 부끄러웠던 감정이 무뎌졌을 때쯤에야 연필을 꺼내 들었다. 지우개 달린 연필을 깎으며 제 책상 주위로 몰려들 반 아이들을 상상했다. 부러움 가득한 눈빛들, 그리고 거만하게 필통 지퍼를 닫는 내 모습까지.

그 귀한 연필은 공책에 닿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까지 우아했다. 하지만 반전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글을 쓰다 틀린 부분을 지우려 했을 때였다. 우아한 분홍색 지우개는 내 실수를 깨끗이 지우기는커녕 흑심의 검은 자국을 흉하게 번지게 했고, 급기야 종이를 짓이기고 찢어버렸다.

연필과 지우개는 본래 성질이 달라 결합하기 까다로운 존재다. 연필 뒤의 고무는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어버려, 지우는 도구가 아니라 종이를 망치는 흉기가 되곤 한다. 리프먼이 만든 세기의 발명품이 내게 남긴 건, 수정을 하려다 종이만 찢어 먹는 자괴감뿐이었다.

쓸모없음을 알아버린 지우개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자존심과 맞바꾼 것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경멸의 눈빛을 견디며 얻어낸 ‘부의 상징’은 정작 내 실수를 지워주지도, 내 마음을 위로해주지도 못했다.

3. 그럼에도, 욕망은 남았다

리프먼은 지우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연필에 붙였지만, 정작 지우개의 기능에 대해선 깊게 고민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후로도 쓸모없는 지우개가 달린 연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껏 꾸준히 욕망해왔다. 연필 가게에 가면 으레 지우개 달린 연필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가고, 내 책상 위 한자리를 차지한다.

도구는 때로 기능보다 ‘소유한 기분’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도 한다. 그 시절 연필 끝 지우개는 소시지나 게맛살 같은 금지된 풍요의 상징이었다. 나는 연필이 상징하는 작은 권력에서 결핍을 배웠고, 이제는 그 결핍을 동력 삼아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과 찢어진 종이의 기억이 오늘의 나를 만든 셈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가끔, 연필 끝의 지우개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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