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사랑이 뭐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이긴 해? 유니콘 같은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안 보여? 나한텐 네가 전부인데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시큰둥한 질문에도 활기찬 답변이 돌아오는 그를 신기해하는 중이었다. 내 앞에는 언제나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굴러다니는데, 그의 앞에는 꽃길만 있었는지. 그에게서 분홍색 단어들이 흘러나와, 빛을 잃은 회색의 나에게 부딪쳤다.
-뜨겁게 빨리 달아오른 사랑은 금방 식어 두고 봐.
-난 네가 너무 좋아. 난 오래오래 팔팔 끓을 꺼야. 두고 봐.
-나를 얼마나 만났다고, 나에 대해 다 알지도 못하면서 전부를 사랑한다는 게 가능해?
-사랑은 다 알아야 가능한 게 아니야.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게 됐어.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 금방 지나갈 거야. 두고 봐.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카레 냄비를 꺼내기 가장 적합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냄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어깨와 귀 사이에 있는 휴대전화가 마찰력을 무시한 채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에 힘을 주자 이번엔 손에 들려있던 냄비가 균형을 잃었다. 순식간에 카레가 가득 담긴 냄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뚜껑이 날아간 카레는 자유를 얻어 천장까지 튀어 올랐다.
-악!
-왜? 무슨 일이야?
-나 카레가 천장까지 튀었어. 끊어봐.
당황스러운 몸뚱이가 어디부터 가야 하는지 허우적거리다, 눈에 띈 행주에 대충 물을 묻혀 식탁 의자를 밟고 올라갔다. 최대한 카레 영역을 넓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카레가 묻은 천장을 서둘러 닦아냈다. 아무리 닦아도 노란 자국은 없어질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도 천장까지 요동치던 카레는 대부분 원래 자기들이 있던 냄비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장관이었는데, 이 와중에 주책맞은 실소가 나왔다. 사방에 튄 카레 방울들을 닦으면 되는데, 매끈한 면을 갖는 물건들과 달리 울퉁불퉁한 벽지에 묻은 카레는 완전범죄를 꿈꾸는 나의 꿈을 짓이겼다. ‘쯧쯧‘ 엄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익숙한 그 표정으로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풀어낼 것이 보였다. 왜 먹지도 않던 저녁을 챙겨 먹겠다고 움직여서 이 난리인지,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온몸의 관절을 이용해 정신없이 식탁 상판 밑에 튄 카레를 닦고 있는데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렇게 끊어놓고 왜 전화를 안 해. 걱정되게.
-얼마나 지났다고.
-30분이나 지났어.
행주를 집어 던지며 식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휴~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너에게 내가 그 정도라면 우리 그만하자.
-아니, 지금 천장까지 튄 카레를 힘들게 치우고 있는 나한테 그게 할 소리야?
-방금도 그래. 카레가 천장까지 튀었다는 게 말이 돼? 너 나랑 전화 통화 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야?
목 뒤 피가 흐르는 자리가 뜨거워졌다. 옆에 놓인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아 휴대전화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내가 너한테 호감이 있던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나는 누구를 알아가고, 깊이 있는 마음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 같아. 지금까지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으니까. 내 속도가 마음에 안 든다면 여기에서 그만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근데 나 너 안 싫어해.
-근데 왜 전화를 안 해? 좋아하는 사이는 하루 종일 생각나고 전화하고 싶은 거 아니야? 왜 하루에 한 번도 전화를 안 해?
-난 누구한테도 전화를 안 하는데? 그걸 해야 하는 거야?
-응.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나면 목소리 듣고 싶은 게 당연한 거야.
당연한 게 어디 있나, 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을 돌려 까는 건가? 옳고 그름을 따질 기운이 없었다. 그냥 향하던 감정에 이름이 생길 때까지만 지속해 보기로 했다. 하루에 한 번 의무적인 통화 연결을 노력하는 걸로 우리의 연결선은 조금 더 연장되었다.
지금 나는 감정의 이름표보다 미래의 방향 지시표가 필요한 새 학기다. 졸업을 앞둔 새 학기는 더 무겁게 나를 눌렀다. 나를 더 집중하고 더 채찍질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내가 아닌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게 옳은 결정일까? 왜 안 하던 짓을 계속 하는가?
이미 노랑이 물들어버렸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