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켜도 지장 없음!

들켜도 지장 없음!
Photo by Patrick Hendry / Unsplash

나는 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나 사회적 자아인 페르소나를 지니고 산다고 하지만, 나는 페르소나를 '가식'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느 날, "기왕에 가식을 떨거라면 위악이 아니라 위선을 떠는 게 왜 나빠?"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그나마 마음의 짐은 덜었다.

페르소나가 강하면 본래 자아를 잃는다고들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억압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과정 자체도 좋다고 볼 수가 없다. 오랜 세월 억압해 온 결과로 나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오래된 질문이었다.

성격, 심리 검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가끔 답을 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페르소나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타당도 항목으로 어느 정도 거를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이상화 된 나 자신'에 맞는 항목을 고르고 있는 건 아닐지 의심했다. 페르소나가 전면에 나서서 사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심리 검사의 답도 그 모습에 맞는 항목에 체크하지 않겠나. 게다가 그런 정도라면 페르소나가 원래 자아를 삼켜버린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은 정도 아닐까. 그런 이유로 나는 나의 사회적 자아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했다.

페르소나가 나를 먹어 치우기 전에 파악을 해야 했다. 사회적 자아는 왜 강해지는 걸까. 내 경우엔, 원래 자신의 모습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려면 감춰야만 하는 모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진짜 나에 대해 알게 되면 상대방은 나를 욕하든가, 우습게 보거나 떠날 것이라는 믿음. 세상은 잔인한 곳이고 내가 약점을 드러내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고 나를 산 채로 먹어버릴 것이라는 경각심.

세상은 안전하지 않고 어차피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타인의 선의조차 한 번은 의심해야 한다고 여겼던 나는 ‘존재가 온전히 받아 들여지는 경험’을 여태 못해봤다. 다만 중년이 다 돼서야 관심을 갖게 된 심리학의 영향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감각, 안전하다고 여긴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냈을 때 배척당하지 않은 경험이 쌓여 ‘나를 드러내도 죽지 않는 구나’라는 인식이 쌓인 결과다. 그로 인해 전보다 조금 시끄러워지고, 말이 많아지고, 자주 웃고, 또 가끔 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이 들어왔다. 내가 완벽할 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어떤 누군가도 결국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었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내려놓음으로써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노화를 두려워하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하루 하루를 조급해 하면서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세월. 순리와 싸우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절대로 알 수 없었던 감각이다. 젊은 혈기라는 말이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 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이 중년에 겪는 사춘기를 갱년기라고 한다더니. 아직 갱년기는 오지 않았건만, 덕분에 사춘기 때는 단어조차 알지 못했던 페르소나에 대해 여러 날 곱씹고 있다. 언제나 인식만으로 충분한 건 없지만 거기가 시작점이라는 건 안다.

그렇게 나는 내 무의식 밑바닥에 있는 날 것의 욕망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인지 머릿속은 꽉 차고, 언어는 풍부해졌다. 덕분에 나를 소재로 글을 쓰는 게 가능해졌다. 어쩐지 지금 나는 어떤 터널을 통과하는 중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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