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작 _ 영화 <스파이>
한국인에게는 한 해를 시작할 기회가 세 번 주어진다고 한다. 1월 1일, 설날, 3월이다. 어릴 때부터 새로운 환경에 진입하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잔뜩 만나왔던 3월은 긴장감과 기대감이 공존한다. 양력과 음력의 시작을 모두 놓친 우리에게 3월은, 습관처럼 찾아온 ‘써드 찬스(third chance)’이다.
하지만 지금 난 이 기회마저 외면하고 싶다. 기대감이 사라진 자리에 의무감만 가득 찼기 때문일까. 어쩌면 두려움이 강해서일지도 모른다. 안주해서는 안 될 것 같지만, 어떤 취미와 자기 계발로 나를 채워야 할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이미지 출처: 영화 <스파이>(2015) 공식 스틸컷 © 20th Century Fox
나는 불안감으로 시작을 미루고 싶을 때, 폴 피그 감독의 코미디 영화 <스파이>를 본다. 이 감정의 실체를 유쾌하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주인공 수잔 쿠퍼는 교사 출신으로, 10년 전 미국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에 입사하여 사무 정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전담하는 요원은 아름답고 능력 있는 남자 브래들리 파인이다. 수잔이 처음 CIA에 입사할 때 멘토이자 짝사랑 상대이기도 하다.
수잔은 ‘에이스’ 요원 파인의 현장 업무를 돕는 데서 보람을 느끼며 산다. 언뜻 일 그 자체보다 그의 특별한 동료가 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사랑하는 파인이 자신의 도움만 원한다는 사실에서 얻는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둘의 관계는, 실용적이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목걸이 선물을 받아도 불평할 수 없을 만큼 기울어졌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든다. 수잔은 정말 파인을 사랑한 걸까.
수잔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자신의 한계를 주입받았다. 그것을 극복해 보고자 교사를 그만두고 CIA 요원이 되었다. 현장 요원이 아닐 뿐, 사무 정보 요원도 엄청난 능력이 필요한 자리다. 수잔은 외국어에도 능통하며, 그의 정보 없이 파인은 임무를 진행할 수 없다. 게다가 수잔은 처음 입사했을 때 치렀던 훈련에서 매우 우수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다. 현장 요원이 될 수 있었음에도 파인의 말에 흔들려 그의 전담으로 남은 것이었다.
왜 그 당시 현장 요원이 되지 않았냐는 국장의 질문에 수잔은 말한다.
"Fine made some great points. I match better with just staying..."
(파인의 말이 맞아요. 저는 그냥 이 자리에서 일하는 게 더 어울려요.)
"In his ear. Yeah, he sniped you. All the top agents used to do that before I got here."
(파인을 보조하는 자리 말이지. 그래, 그가 너를 주저앉힌 거야. 내가 오기 전까지는, 잘나가는 요원들이 다 그런 짓을 했지.)
수잔은 파인의 의도를 아예 모르지 않았을 테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온 곳에서 수잔은 또다시 자신을 주저앉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는 절망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못생긴 목걸이만큼의 절망감 말이다. 대신 일상의 잔잔한 공허함을 파인을 향한 사랑으로 채웠다.


이미지 출처: 영화 <스파이>(2015) 공식 스틸컷 © 20th Century Fox
그래서 수잔은 자신의 이상향을 파인에게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첫 장면부터 파인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인은 재채기하다가 생포해야 할 악당을 사살한다.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에 임무가 크게 어그러졌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능력을 웃도는 자신감은 그를 정말 우수해 보이게 만든다. 이때 수잔은 적극적으로 그의 변명을 대신해 준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가 훌륭할수록, 현장 요원직을 포기한 정당한 이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 수잔이 임무를 해내는 과정을 담았다. 그가 어설프면서도 본인의 재치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은 쾌감을 준다. 또한 영화 말미에 수잔은 그 누구보다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자신 있다. 본인이 구해낸 파인 ‘왕자님’을 굳이 보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수잔에게 진정한 보상은 자기 확신이었으므로.
한바탕 유쾌하게 웃고 나면, 힘이 생긴다. 3월을 시작할 용기, 실체 없는 공허함과 불안감을 지워줄 자기 확신 말이다. 이제 못생긴 목걸이를 끊을 준비가 되었다. 더 이상 시작을 미룰 이유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