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성적 판타지가 궁금한 이유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여성의 의도가 정말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대체 그렇게 옷을 (안) 입은 이유가 뭐예요?’라고 물었다간 옆의 남성에게 얻어맞을 게 뻔했다. 그래서 참았다. 애가 보는 앞에서 두들겨 맞을 순 없으니.
피부과에서 치료를 받는 애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병원 대기실의 정적을 깨고 한 커플이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곳으로 쏠렸고, 곧이어 설명하기 힘든 난감한 침묵이 흘렀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리는 여성들과 까만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이는 남성들 간 표정의 대비. 이것은 과연 나의 착각이었을까.
상의도 만만치 않았지만 핵심은 여성의 스커트였다. 벌룬 스커트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것은 하반신을 가리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노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연극적 장치에 가까웠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내 시야에는 원치 않았던 장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슬아슬한 검은색 속옷과 대비되는 살색의 면적이 지나치게 넓어, 마치 일상적인 공간에 영화 <아노라>의 스트립 댄스 시퀀스가 강제로 재연되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타인의 차림새에 무심한 편이지만, 이 정도의 시각적 습격 앞에서는 무심함조차 소용없었다.
남자가 진료실에 간 동안 셀카를 찍느라 바쁜 여성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풀메’를 하든 성형을 하든, 탈메이크업을 하든 ‘탈코’를 하든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자기가 꾸미고 싶으면 그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고 더 나아가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매애를 저버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끔 섹스어필을 강하게 주장하는 옷차림을 볼 때 혼란스럽다. 자기 표현의 실현이라고 하기엔 TPO와 표현 수위가 상당히 높으니 말이다. 시선을 가져와 자기의 권력욕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여성들의 옷차림 때문에 성폭력이 유발될 수 있다는 헛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모든 여성을 옹호할 수 없고 그게 옳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안다. 자기가 자매들의 일상에 어떤 짓을 하는지 모르고 가부장제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여성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여성을 그리 만든 체제와 구조가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지만, 불편한 시간을 감당하는 동안 어떤 설명이 가 닿을지 혼란스러워졌다.
누군가는 그를 가부장제를 이용해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이라 할지 모르지만, 내 눈엔 그가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타인의 시선을 난폭하게 탈취하는 권력자로 보였다. 그 무례한 당당함 앞에서는 피해자 유발론을 주워섬기는 여성 혐오론자들의 조롱 따위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개인의 일탈적 권력이든 자기 표현의 자유든, 그걸 무어라 부르든 뒷감당은 고스란히 공동체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느꼈다. ‘저렇게 보여주고 싶어 하면서 쳐다보는 건 왜 불쾌해 하느냐’는 폭력적 반문 앞에서 대상화에 저항해 온 목소리는 모순이라는 단어로 돌아오곤 한다. 그와 동시에 내가 갖고 있던,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과연 온당한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의 옷차림을 그저 태평하게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볼 수 없는 나의 시선에 문제는 없었는지. 나 또한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건 아닌지 말이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아느냐고. 하지만 그렇게 묻기보다 내가 오독했음을 인정하는 쪽이 마음이 편하겠다 싶었다.
만약 그 여성의 성적 판타지가 타인에게 자기 엉덩이를 보여주는 거라면? 권력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성적 암시를 표현하려는 의도라는 건 내 오해일 뿐이고 순수하게 자기표현의 장치라면 어쩔 건가? 결론은, 내게 오래된 혼란을 불러일으킨 당사자가 차라리 격렬하게 자기표현 중인 쪽이 낫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그래야 수긍을 하지.
그 정도 이유는 돼야 이와 같은 이질적인 혼란을 견뎌줄 용의라도 생길 것 같았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