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여기 두 여자가 있습니다. 한 명은 칼을 쥐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힘을 보탭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도, 망설임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숨 막히는 집중만 있을 뿐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장면(Judith Slaying Holofernes)〉입니다.
유딧은 적장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같은 성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많습니다. 하지만 남성 화가들이 그린 유딧은 어딘가 연약해 보입니다. 피가 튀길까 봐 몸을 뒤로 빼고 얼굴을 찡그리는 소녀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갸냘픈 주체가 참혹한 과업을 완수한다는 대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연약함 때문에 극적효과는 배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승리의 서사에서도 여성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왜곡된 여성상을 고착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아르테미시아의 유딧은 다릅니다. 처음부터 이 일을 완수할 사람처럼 강인한 투지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하녀 아브라 역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닙니다. 물러서지 않고 함께 몸을 기울여 기꺼이 힘을 보탭니다.
미술사학자 메리 개러드는 바로 이 지점을 짚었습니다. 아브라는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니라, 여성들의 연대가 화면 안에서 가시화된 존재라고요. 여성과 하녀라는 계급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오직 독립된 주체로서 맞닿은 이들의 연대라니,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뜨거운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1593년 로마에서 태어난 아르테미시아는 화가인 아버지 오라치오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아 일찍이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열여덟 살 무렵, 아버지와 프레스코화를 공동 제작하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겁탈당합니다. 이어진 재판에서 그녀는 자신의 진술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해자와 대질하며 '시빌레(sibille)'라 불리는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시빌레는 17세기의 거짓말 탐지기라 불리던 고문으로, 피해자가 자신의 결백을 육체적 고통으로 증명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손가락에 줄을 감아 막대기로 조이면 줄이 살을 파고드는데, 거짓이라면 이토록 참혹한 고통을 감내할 리 없다는 가해자 중심의 기만적인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이 야만적인 폭력을 끝까지 버텨냈고, 마침내 타시에게 유죄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시는 풀려납니다)
아르테미시아는 피렌체로 떠나 오직 그림에 매진했습니다.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 가입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고, 베네치아와 나폴리, 런던을 오가며 왕족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카라바조의 극적인 명암법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변주해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남편은 그녀의 재능을 시기하고 품행을 의심하며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세상의 인정과 가장 가까운 곳의 폭력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런 사건들과 그림을 연결 짓는 시선이 오히려 그녀를 독립적인 바로크 화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논란이 있습니다. 피해의 그늘이 예술의 빛을 가린다는 우려입니다. 그 긴장은 이 글을 읽는 내내 함께 품고 가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극도로 제한적이던 시대, 아르테미시아는 서른 살 무렵 여성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계약서에 직접 서명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당시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서류에 남길 수 있는 경우는 대개 남편과 사별한 뒤에나 허락되던 일이었지요. 젊은 나이에 쟁취한 이 서명권은 그녀가 단순히 누군가의 보조자가 아닌, 독보적인 화가로서 당당히 입지를 다졌음을 증명합니다.
그런 그녀가 사후에는 빠르게 잊혔다는 사실이, 그래서 더 주목할 만합니다. 작품 대부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귀속되었고, 미술사 기록에서 그녀의 이름은 지워졌습니다.
1916년 로베르토 롱기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미술사 안으로 다시 불러냈습니다. 그는 그녀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 찬사는 곧바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판단과 남성 화가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위계적 평가로 이어졌습니다.
1963년, 미술사학자 부부인 루돌프 위트코버와 마르고 위트코버는 그녀를 "방탕하고 조숙한 소녀"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 모욕적인 수식어를 붙인 다음에야 뛰어난 화가라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성취는 언제나 피해 사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전환점이 된 것은 1971년이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이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녀는 물었습니다. '위대함'이라는 기준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기준은 처음부터 공정했는가라고요.
그리고 197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는 아르테미시아를 온전하게 복원했습니다. 미술사학자 앤 서덜랜드 해리스는 그녀를 "서양 미술사에서 동시대 예술에 부인할 수 없는 기여를 한 최초의 여성"이라 정의했습니다. 비로소 피해자가 아닌, 온전한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시선을 뚫고 300년이 흐른 뒤에야, 아르테미시아는 불렸어야 마땅한 자리로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틀레스키의 그림을 감상해보세요!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 'Juditha Triumphans' 중 'Armatae face et anguib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