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봄 _ 음악 <벚꽃엔딩>과 <입춘>
지독한 더위가 한풀 꺾인 저녁, 피부에 닿는 바람이 서늘하다. 해가 지는 시간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아, 정말로 가을이 싫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도리어 봄노래가 생각난다.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재생했다. 장범준의 목소리가 진성에서 가성으로 변할 때마다 벚꽃잎이 내 눈앞에 흩날리듯 생생하다. 영상 댓글 창엔 저마다 노래와 관련된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다지 공감되지 않는다.

이 노래가 전국을 강타했던 당시에 나는 봄을 싫어했다. 내 하루가 밤늦게 끝나는 날이 많던 때였다. 해가 길어져 어쩌다 밝은 초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면, 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선율에 깊은 고독감을 느꼈다. 그래서 봄이 싫었다. 나는 아직 움츠리고 있는데, 날이 따뜻해졌으니 남들처럼 강제로 몸을 펴야 했다. 장조로 가득한 꽃노래를 좋아하는 척해야 했다.
‘홍대 병’이란 말이 있었다. 대중적인 취향을 거부하며 일부러 마이너 감성을 내세우는 사람을 꼬집는 말이었다. 홍대 병의 문제는 그런 자기에 취해 대중성을 비난하는 거였다. 남의 취향을 비난해야 내 취향이 빛난다는 착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하지만 억울한 홍대 병도 있었다. 일찍이 개성을 찾은 친구들은 빛이 났지만 동시에 쉽게 비난받았다. 대중성이 취향인 사람들에겐 일종의 모욕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나는 둘 다 부러웠다. 꽃노래에 남들처럼 감동하지 못하면서, 지산 록 페스티벌에서 청춘을 불태우는 동기들이 부러워도 직접 갈 생각은 하지 못하는 사람. 메이저도 마이너도 아닌 무미건조한 사람. 그게 나였다.
영상 출처 : YouTube <한로로 (HANRORO) - 입춘> Official M/V
딱 10년이 지난 2022년 봄, 한로로의 <입춘>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이 노래를 얼마 전에 접했다. 내 알고리즘은 Z세대와 어디까지 멀어진 걸까. 내 세대 가수의 커버 영상을 보고 나서야 그동안 어설프게 들었던 한로로의 이름을 제대로 인식했다. 한순간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내가 찾던 봄노래는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신기했다. 한로로의 음악은 ‘우리 때’엔 마이너 감성이라고 불리던 것이었다. 특히 <입춘>은 라디오헤드(Radio head) 명곡 <Creep>의 코드 진행과 닮아있다. 90년대 음악인 〈Creep〉은 〈벚꽃엔딩〉이 메이저이던 2012년에는 마이너 영역이었다.
가사도 마찬가지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벚꽃엔딩>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 인사를 건네줘요 / 초라한 나를 꺾어가요 이 벅찬 봄날이 시들 때 한 번만 나를 돌아봐요’ <입춘>
적극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앞으로 펼쳐질 행복을 기대하는 청춘(靑春)을 담은 <벚꽃엔딩>과 다르게, <입춘>은 홀로 불안을 삭히는 청춘을 위로하는 노랫말로 가득하다. 소담하게 쏟아지는 진분홍색 물결과 얼어붙은 땅을 밀어붙이며 겨우 피어나려는 여린 잎 하나. 절정(絶頂)의 순간과 미동(微動)의 순간. 봄을 노래하는 청춘의 언어가 이토록 다르다.
물론 입춘 이전에도 봄을 다르게 노래한 곡들이 없지는 않았다. <봄봄봄>, <봄 사랑 벚꽃 말고>, <우연히 봄>, <봄이 좋냐>… …. 청춘의 사랑을 노래하면 다음 해엔 어김없이 정반대의 노래가 뒤따라왔다. 하지만 <입춘>은 그동안의 전제를 벗어나 봄의 정의를 새롭게 썼다. 눅진한 록 사운드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여린 목소리로 질척임을 읊는 것. 역설은 묵직했다.
가을을 맞으며 찾아오는 계절성 우울의 시간, 내게 진정 필요했던 건 <입춘>의 고백이었나 보다. 메이저와 마이너 사이에서 오래도록 부유하던 나는, 봄의 서늘함에 비로소 위로받았다.
봄과 가을은 같은 온도였다. 이제야 <벚꽃엔딩>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