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사랑이라는 오답_영화 <옵세션>
여자는 문 앞에서 출근한 남자를 기다리며 용변을 그 자리에 선 채 해결한다. 퇴근해 돌아온 남자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욕실로 들여보낸다. 더럽고 냄새나서 미안하다는 여자의 사과를 그는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자는 모습이 귀여워 새벽의 어둠 속에서 자기를 쳐다보는 여자를 보고 놀란 남자는 불길함을 애써 지우기로 결정해 버린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자기 스웨터를 입고 하염없이 남자를 주시하는 맹목적 사랑이 좋으면서 동시에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남자가 사랑한 건 대체 무엇/누구일까. 영화 <옵세션>에서 남자는 싸구려 장난감에 소원을 빌었던 결과로 짝사랑 상대인 ‘니키’에게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을 받게 되지만 “세상 누구보다 사랑받는” 경험은 공포 그 자체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를 포함해 사람들은 남자가 빌었던 소원, “니키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게 해주세요”가 왜 문제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는 지점은 니키가 죽고 싶을 만한 고통을 호소했음에도 남자가 무시와 회피라는 답안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니키가 자기 자신보다 남자를 더 사랑하는 바람에 자기 일은 물론이고 수면과 배변 활동마저 멈추고 남자를 끊임없이 욕망하게 된 것에 공포 말고 책임감을 느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여자가 쏟아낸 오물과 통제 불가능한 맹목성 앞에서 남자가 느낀 당혹감과 공포는 그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원했던 건 ‘진짜 니키’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자기만의 관념 안에서 ‘잘 세팅된 니키’였음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었다.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사랑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한다. 타자를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순간, 에로스는 숨을 거둔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에로스는 단순히 낭만적 감정이나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를 향한 경험을 뜻한다. 인간이 에로스를 성취하면 타자를 통해 나의 감옥을 부수고 삶의 반경을 넓힐 수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바랐던 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 아닌 셈이다. 그는 납작한 낭만적 감정과 육체적 욕망이나 해소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 이기적이고 나르시시즘적 소망 앞에서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는 자기 자신마저 지워버리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모두가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타자에 대한 고려 없이 내 입맛에 맞게 상대를 사물화하는 행위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을 때 어떤 지경에 이르는지, 공포라는 장르를 통해 잘 보여주었다. ‘원 위시 윌로우(One Wish Willow)’라는 조잡한 기구에 소원을 비는 장난 같은 행위가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는 지점을 영화는 꼬집고 있었다.

인간이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길 중 하나는 타자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라고 했다. 한병철이 말하는 에로스를 인생에 들이는 일의 위대함에 동의한다면, 남자는 이 에로스의 축복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 셈이다. 애초부터 남자는 사랑이 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자의 본질은 고사하고 감정조차 안중에도 없었던 셈이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나마 얼마나 비틀린 소원을 빌었는지 자각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