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으로 나를 보기
아무래도 나는 본다는 것과 평가한다는 것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본다는 건 그냥 눈에 들어온 심상을 관찰하는 것에 불과하며, 평가는 본 것에 대한 판단이나 가치가 끼어드는 것이다. 문자의 의미야 알았겠지만 평가와 자기 객관화의 결론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그걸 여태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오랜만에 진료를 보러 정형외과에 간 김에 아침에 일어날 때 손가락 관절이 뻐근해지는 증상에 대해 의사에게 물었다. 양쪽 다 그런 게 아니라 수술했던 손만 그런 증상이 있어 관련성이 궁금했던 것이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나이로 미루어보면 갱년기 증상이 올 수 있어요. 갱년기의 첫 번째 증상이 아침에 일어날 때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거거든요. 건초염이라고도 하는데 통증이 심하면 소염제 같은 걸 먹을 수도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세요……”
그 뒤부턴 생각이 안 난다. 갱년기가 올 수도 있는 나이와 노화라는 단어에 이미 사로잡힌 뒤였기에. 늙어서 그런 거니 진통제를 먹든, 참고 살든지 해야 한다는 것은 그나마 건진 해결책이다. 아프다고 진통제를 먹는 성정이 아니니 그냥 아픔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노화로 인한 여러 가지 증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얼굴에 기미가 생기고 주름이 늘어도 노안으로 눈이 어두워져 잘 안 보이니 다행이라며, 인체의 시스템이란 참 효율적이라고 감탄한 적도 있었는데. 왠지 내가 내린 결론이 속 편한 자기 위안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피하고 싶었다. 늙어가는 내가 아니라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노화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기이하다고 여기면서 관절 통증으로 촉발된 객관적 평가에 무너지는 어른이라니. 그저 나는 자기 객관화에 능하다 착각이나 하고 살았던 셈이었다.
어쩐 일인지 스스로 나이에 무심하면 사람들도 나를 어리게 볼 거라고 믿어왔던 것 같다. 그러니 한 번씩 병원 같은 곳에 가면 내 나이를 자각하게 된다. 그러면 자꾸 조급해지고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병원 갈 일이 없어져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어쩌면 나는 세상의 눈으로만 나를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스스로 느끼는 내가 낡지 않았다고 느끼면 괜찮다. 의사의 말이니, 그가 권위로 나를 휘둘렀을 뿐이라고 생각해도 관계없다. 문제는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느냐다. 나이를 의식하고 살지 않는 건 좋지만 언제까지나 청춘인 것처럼 사는 태도 또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준비 여부와 상관없이 내게도 노화와 죽음이 찾아올 것이고(이미 시작되었지 않은가) 언젠가 이 생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소멸할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나 한 사람의 소멸은 이 우주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나란 존재는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 다를 게 무엇이길래 그걸 받아들이는 게 일평생 그리도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내가 늙어가는 것도, 죽음을 향해 한 발씩 가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극복이니 뭐니 할 것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그 뿐. 엄연한 질서 앞에서 한 사람의 의미란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다.
의사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친절한 설명에 따라온 상념의 끝이 그리 나쁘진 않다. 하루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어두운 방에 처박혀, 생생한 젊음이 팔딱거리는 아시안게임을 보며 자학이나 하려고 했더니만.
맨살에 닿는 바람이 서늘하다. 정리를 해야 할 계절이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