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굴리는 데 필요한 85% _ 드라마 《영 셸던》
‘환승 이직’에 성공했다. 지난 몇 년간 위장병을 앓아가며 애써왔던 게 무색할 만큼 나의 거취는 빠르게 정해졌다. 이력서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간단한 지원 양식만 보고도 면접이 잡혔다. 내 일정에 다 맞춰주겠다 하여 기존 직장에 연차를 내지 않아도 됐다. 유달리 잘 본 것 같지도 않은 15분이 지나 이틀 후 합격 연락을 받았다. 연휴 전에 모든 인사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었나 보다. 덩달아 나도 바빠졌다. 그전에 퇴사 의사를 밝혀야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일사천리지 않은가. 부랴부랴 사직서를 쓰면서 생각에 빠졌다.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도 합격이 번복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이런 불안감을 뭐라고 하더라. 뭐, 심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한다. 평소엔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 해소하려 했겠지만, 이번에는 어떤 심리 이론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미나이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 구글에 ‘합격 후 취소 두려움’을 검색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한 트럭이었다. 그제야 안심했다.
단순 반복 업무였기에 인수인계는 필요 없었다. 아쉬움이 문제였다. 계약직이긴 해도 근무 조건이 더 좋아진 참이었다. 재택근무인 데다가 소소하게나마 꾸준히 인정받는 환경이었다. 끝을 알면서도 괜히 덜컥 다른 일을 구했나 싶었다. 이런 마음은 첫 출근을 해야 사라질 것이었다.
환승 이직은 처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전 직장들은 훗날을 도모하지 않고 ‘퇴사할게여’를 외치고 나왔다. 그때마다 상사들은 내 장점과 미래를 말하며 나를 만류했다. 일은 재밌었고 보람찼다. 그런데도 왜 나는 서둘러 떠나려 했던 걸까. 공백이 길어지고 다른 직장을 거치며 미화됐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를 200%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갓 퇴사한 곳에서는 나의 80%만 썼다.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단순한 일이 나를 만족시켰다.


이미지 출처: 드라마 《영 셸던》 공식 스틸컷 © CBS /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실은 이번 이직이 쉬웠던 이유도 알고 있다. 경력이 충분했고, 허투루 일하지 않았기에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돌아가길 거부했을 뿐이다. 퍼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는 내가 배운 7차 교육과정에서 ‘위치 에너지’라 불렸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 운동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도록 저장된 에너지를 뜻한다. 드라마 《영 셸던》 시즌 5, 3화는 응축된 잠재력을 용수철 튕기듯 발휘하지 않고 바닥에 묵혀두기만 하는 인간의 특성에 질문을 던진다. 왜 사람들은 제 능력을 엉뚱한 곳에 썩힐까.
박사학위 2개의 72세 과학자 스터지스 박사는 중대 과학 연구팀에서 허무하게 해고당한다. 실의에 빠진 그가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동네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백 보이(bag boy)가 된다. 하지만 그는 백 보이로 살기엔 가방끈이 지나치게 길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연구에 쏟아야 할 잠재력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여 학교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권유한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에서 각자가 자신의 천성에 따라 자기에게 알맞은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유학자도 각득기소(各得其所)를 부르짖지 않았던가. 하지만 스터지스 박사는 천성을 찾아 이미 수십 년간 소임을 다해온 인물이다. 평생 바쳐온 과학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처럼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로 다가왔을 때, 그는 바위를 내려놓기로 했다. 오랜 기간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연구를 반복한 후 내린 선택을 무작정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는 한밤 중 길 한가운데서 스터지스 박사와 동료 링크레터 박사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이상하리만치 해맑게 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있었다. 타인의 눈엔 대책 없는 낙오자처럼 보이지만, 스터지스 박사는 삶의 진리를 깨달은 참이었다. 그가 연구를 그만두며 바위를 내려놓은 줄 알았지만, 실은 다른 바위를 굴리고 있었다. 과학자든 백 보이든, 결국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하는 게 삶이었다.
카뮈는 형벌 같은 삶을 행복으로 승화시킬 비밀 하나를 알려준다. 바로 ‘직시(直視)’다. 반복되는 무력감을 의식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 반복하는 운명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일하기엔 늙고 죽기엔 어린 박사들이 그러하였듯, 직시의 순간 우리는 노래하고 춤출 뿐이다. 스터지스 박사는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평생 해온 연구의 재미를 놓치기 아까웠을 것이다. 잠시 쉬었으니 용수철의 퍼텐셜 에너지도 가득하다.
참다 견딜 수 없어 직장을 던져버렸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200%를 쏟아붓든 80%만 쓰든, 어차피 바위를 굴려 올리는 삶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직시하지 못했다.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새로운 바위 앞에 섰을 뿐이다. 다행히 이 바위는 85%만 발휘해도 굴러갈 것 같다. 인심 썼다. 90%까지만 쓰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