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시콜과 나이팅게일의 문
2018년, 일본 열도를 뒤흔든 도쿄 의과대학 입시 조작 사건은 충격이었다. 대학 측이 여성 합격자 수를 줄이기 위해 10년 넘게 여성 수험생들의 점수를 일괄 감점해 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보다 더 입을 다물 수 없게 한 것은 현직 여성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응답자의 65%가 여성 수험생에 대한 입시 차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로 답했다는 것이다.
“부당하지만 남성 의사가 없으면 현장이 돌아가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으로 동료의 몫까지 당직을 서다 유산을 반복했다. 더는 무리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이 곧 후배들의 진입을 막겠다는 뜻은 아니다. 대학이 내세운 인력난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과 또 다른 여성의 문을 닫아걸겠다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다만 먼저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간 여성들이 그 문이 좁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자체가 구조의 잔인함을 방증한다.
1854년,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벌어진 크림전쟁은 지옥에 가까웠다. 총탄 뿐만 아니라 콜레라와 이질, 동상과 영양실조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그 소식이 런던에 전해지자, 자메이카 출신의 한 여성이 영국 육군성의 문을 두드렸다. 메리 시콜(Mary Seacole)이었다.
시콜은 자메이카와 파나마에서 의료와 돌봄의 경험이 있는 간호사였다. 시콜은 약품과 붕대를 들고 전장으로 갈 수 있는 간호단에 합류하길 원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콜이 나이팅게일이 이끌던 간호단에 지원해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널리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거절의 정확한 경위와 이유는 지금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간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도,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성의 모습에는 매우 좁은 규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이팅게일 역시 당대의 가부장제와 싸우던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천시받던 간호를 직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편견과 맞섰다. 제도적 틀 안에서 인정받은 나이팅게일과 달리 틀 바깥에 있던 시콜의 자리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계급과 피부색, 교육과 인맥에 따라 문의 거리는 달랐다. 그리고 먼저 그 문 안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해서, 문밖에 있는 사람과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콜은 자비로 배를 타고 크림반도로 건너가 전선 가까운 곳에 목재와 함석판을 모아 ‘브리티시 호텔’이라는 공간을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식과 물자, 약품을 팔거나 자신이 가진 의료 지식으로 부상병들을 돌보기도 했다. 전선 가까이에서 그를 만난 병사들은 그를 ‘마더 시콜’이라 부르며 따랐다.
전쟁이 끝난 뒤 나이팅게일은 ‘등불을 든 천사’로 불리며 국가적 영웅이 되었지만 파산과 동시에 어려움에 처한 시콜의 이름은 한동안 그 명성의 그늘에 가려졌다. 훗날 전선 가까이에서 그를 만났던 병사들이 뒤늦게 기금 모금 행사를 한 덕에 비로소 그 헌신과 선행이 알려졌다고 한다.
내가 설 자리를 지키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줄여야 하는 구조, 동료의 손을 잡으면 함께 낭떠러지로 밀려날 것 같은 상황에서 연대는 약화된다. 여학생의 점수 감점을 ‘이해한다’라고 답한 여자 의사들에게 손가락질 하기 전에, 애초에 의사 한 사람의 몫이 왜 그리 과중해야 했는지를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팅게일과 시콜이 다르게 행동했다 한들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좁은 문 앞에서는 경쟁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밀어내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시스템. 그것을 향한 ‘연대’는 더 이상 약자들만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