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자의 태도
여러 번의 북토크를 진행하는 동안 관객들이 내게 가장 궁금해 한 질문은 이거였다.
“기록하시면서 구술자의 어떤 모순을 발견하셨나요?”
순간 멈칫했다. 인간의 모순에 관심이 많다는 후기를 쓴 게 화근이었다. 내 구술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귓가를 때렸다. 당사자를 곁에 두고 그의 뒤틀린 삶과 모순을 발가벗겨 전시하라는 요구. 웃자고 하는 얘긴가?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대답 또한 하찮아지는 것이 도리.
“그건,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그랬다. 내가 구술을 채록하면서 좋았다고 느꼈던 날은 구술자가 유독 약해 보였던 날이었다. 잘 벼려진 쇳덩이 같았던 그 단단함을 어떻게 뚫을지가 이번 작업의 성공 여부를 결정할 거라 믿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 또한 구술자가 양해한 것이었겠지만, 삶에 대한 피로감이 묻어났던 그날의 인터뷰가 내 식대로 말해 ‘성공’이었다.
성공의 즐거움에 도취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의료사고 유족들을 인터뷰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낯선 이 앞에서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심드렁하게 그들의 감정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말하는 이의 감정 동요가 심해질수록 내용이 전달하는 진동의 여파도 커질 터였다.
그들의 말을 따옴표 안에 담아내는 동안 나는 때로 울었다. 아마추어 같은 태도라 여겨질까 싶어 나중에는 그마저도 그만두었지만, 상대에게 공감했던 순간의 내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 순간을 머릿속에 문장으로 풀어내는 동시에 그들에게 휴지를 건네며 “힘드시면 그만하셔도 돼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미 기사에 쓸 문장은 완성된 상태였다. 그때의 내 행동은 어떤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가. 인터뷰이를 고려하는 배려, 혹은 연민?
스테판 츠바이크에 따르면 이 감정은 ‘초조한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939년 작 『초조한 마음』에서 스테판 츠바이크는 가짜 연민을 초조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들이 불행을 입 밖으로 말했단 사실에 안도했던 당시의 나는, 타인의 고통을 착취하고 있다는 마음의 불편함을 서둘러 덜어버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것이 ‘말해져야 할’ 고통이었고, ‘기록되어야 할’ 일이었다고 해봐야 그것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닐까.
기사를 쓰던 시절을 생각하는 동안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갈등은 창작자라면 응당 겪어야 할 것이었지만 더 이상 이런 류의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인 것 같았다. 이번에 구술생애 작업을 했던 젊은 청년이 공허한 눈으로 뱉었던 후기가 떠올랐다.
“내가 이 사람을 제대로 그려낸 것 맞나? 어쩌면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은 건 아닐까?”
그는 그 고민을 하게 되면서 더 이상 구술생애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한 사람을 두고 여러 층위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그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는 첫 경험, 내게는 오래된 작업. 초심자와 닳고 닳은 사람, 단순히 그 차이일까. 그걸 뭐라고 부르든, 나는 그 간극이 부끄러워졌다.
기록하는 자의 태도에 관해서라면 내가 펜을 들고 있는 한, 해야 하는 고민이어야 옳다. 그걸 멈춘 나는 더 이상 정당하지 않은 기록자인 셈이고. 저들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다는 자각을 간직한 채 고통의 밑바닥까지 동행하는 것만이 최소한의 연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양분 삼아 글 쓰는 자가 지녀야 할 연민의 무게라는 것을. 그 점을 오래 잊고 지냈다는 것을, 온몸으로 태풍을 맞아 지친 듯한 초심자의 후기가 일깨워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