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수영장
해가 넘어가는 시간은 지독한 졸음을 동반했다. 내 무릎에 가만히 앉아 쌕쌕 숨소리만 내뱉고 있는 아이를 안고 나는 종종 잠에 빠지곤 했다. 아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곧잘 칭얼거리며 다음 이야기를 채근했다. 자그마한, 말 못 하는 등은 동화책의 아기자기한 그림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나는 전날 밤의 음주로 매일 숙취에 시달렸고 그 바람에 책을 읽다가도 잠에 빠지기 일쑤였다.
수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프리 다이빙에 매혹된 때였으니 그 첫 단추를 꿰자 싶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시작은 공포와 경외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바다에 있었다. 영화 <그랑 블루>의 다이버가 속세를 떠나 영원히 바다에서 사는 선택을 한 걸 부러워했던 시절, 동시에 죽음일 수밖에 없는 그 선택을 이십 대의 나는 동경했다. 수영을 시작할 때의 내 정신 상태란 어쩌면 그쪽에 더 가까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작은 예상했던 대로 공포. 성인 풀의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 등에 매달린 풀부이를 떼라는 강사의 말에 치를 떨었다. 바다와 달리 투명한 수영장 바닥은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지만 네모난 타일 바닥의 푸른 빛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코를 찌르는 낯선 소독약 냄새.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소름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리발 수업을 하던 날, 대체 이걸로 뭘 하라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머리에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오리발로 물을 꾹꾹 누를 수 있다는 상상. 다리 근육은 완전히 성난 상태. 하지만 발목은 유연하게. 힘을 주되 움직임은 유해야 한다는 형용 모순이 하나의 영상으로 내게 왔다.
잦은 음주로 불어난 내 몸은 지상에서 느껴볼 수 없는 가벼움을 재현하고 있었다. 투명한 장막이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푸른 빛의 세례를 받아 예민하게 파닥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쓰는 레인에만 열 명 이상이 있었지만 내가 통과하는 동안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남아있었다. 모순을 딛고, 발목이 유연하고도 무겁게 물을 누르는 순간, 내게 전해져 오던 저항감. 벽을 마주하고 턴할 때 내가 물속에서 보는 세상은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뿜은 숨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인간의 솜씨로 빚어낼 수 없는 형상을 자아냈다.
나는 살려고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고, 맹렬하게 호흡이 필요할 때마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나의 의지가 투영된 것임은 분명했다. 죽음을 동경하던 그때 나는 살고자, 누구보다 버둥거리고 있었다.
습하면서도 뜨거운 여름의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는 나서기 무서울 정도로 살풍경했지만, 한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주는 찌르르한 감각은 나를 현실의 세계로 이끌었다.
아, 오늘부터 술 끊는다.
<그랑 블루> 이후 품었던 오래된 갈망은 잦아들고 물 안에서 내가 가졌던 통제의 감각이 현실의 쳇바퀴를 다시 돌리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의지를 짜냈다. 다짐이 무색하게 내 몸속에서는 다른 세포들이 자기들만의 세계를 어마어마하게 증식시키고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던 여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