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사과법

그 남자의 사과법
Photo by mark tulin / Unsplash

세상에는 이런 걸 사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 내가 서운하게 한 것이 있다면 마음 푸세요.”
이게 왜 문제냐면 일단 자기 잘못에 대해 깨끗이 인정하는 태도가 없다는 것이다. “~한 것이 있다면”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라는 바탕이 깔려 있는 셈이다. 게다가 “서운하다”는 단어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나 쓸 수 있는 말. 일방적인 집적거림에 분노한 대상에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위의 사과문은 내가 다니는 성악반의 최고령 남성이 어느 60대 여성에게 사과랍시고 쓴 문자다. 두 사람 다 배우자가 있는 노년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80대 남성이 개인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날씨가 좋으니 차를 마시러 가자,라거나 강습 시간에 자기 옆자리에 와서 앉으라,거나. 메시지를 보내고 주말이면 보이스톡으로 전화도 걸어왔다고 한다. 같은 방향도 아닌데 강습 날 회식 후에는 택시로 데려다 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고.
전술했듯 이 남성은 강습반의 최고령이기에 누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아침이면 넋두리처럼 시작되는 안부 카톡과 여행지에서 인사차 보내오는 사진이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동영상에, 사람들은 멋지다며 답글을 달고 엄지 척을 날렸다. 나는 때로 이 사람들이 진심인가 싶었지만 내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나는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단톡방의 알람을 끄고 신경을 끄는 쪽을 택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나와 친하게 지내던 60대 지인이 강습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궁금증이 극에 달해 문자로 안부를 물었더니 예의 그 남자 때문에 나오기 싫다며 얘기를 듣게 됐다. 내가 신경을 끈 사이에 일방적이고 무례한 행동이 이어졌고 명백한 거부와 함께 사과를 요구했다고 한다. 사과는 위에 말한 대로, 서운한 게 있으면 마음 풀라. 지인은 그 문자를 받고 더 화가 났다고 했다.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 때문에 분노하는 건 동의하지만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왜, 대체 왜, 정작 그만두어야 할 사람은 그 남자인데 왜 피해자인 여성이 관둬야 하냐는 것. 나의 지인 얘기는 그랬다. “연주회 할 때 무대에 있는 나를 쳐다보는 것도 끔찍하게 싫고, 내가 창피해서 어디다 얘기도 못 하고…”
그러니까 말이다. 창피해야 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잘못도 안 한 사람이 창피해 하고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까지 그만둘 생각을 하냐는 말이다.
더 동의할 수 없는 건, 그 여성이 계속 자기의 행동을 곱씹었다는 점이다. “내가, 대체 뭘 어쨌길래 나한테 그랬을까, 내가 무슨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했던 걸까.” 그분은 어눌하게 걷는 남자의 팔을 한두 번 부축한 것 때문에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나이 팔십 넘은 인간이 호의와 성적 어필도 구분을 못 하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런 행동이 성적 대상화의 빌미라면 세상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하긴 너무 익숙한 구도이긴 했다. 산드라 리 바트키는 『여성성과 지배』에서 ‘여성적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들어 이러한 작동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여성들이 타인의 무례나 폭력 앞에서도 분노하기보다 그 상황을 내면화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도록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가부장제로 인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일방적인 욕망 앞에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수치심을 덮어쓰는 기이한 역전 현상을 자주 목도한다.

이 일을 공론화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나의 지인은 사람들에게 이 일이 알려질까 봐 두려워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이상의 설득은 2차 가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뻔했다.
“쌤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만둬야 할 사람은 그 사람인데 왜 쌤이 그만둬요?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저라도 나서서 그 사람 퇴출시킬 테니까 그만두지 마세요.”
그 정도 이야기에 마음을 잡고 지인이 강습에 다시 나왔을 리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내가 전하고자 했던 연대의 의도는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여성 회원들의 노력도 있었다.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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