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가 열어준 세계

최애가 열어준 세계
Photo by Alexander Grey / Unsplash

내게 다른 세상을 열어준 이는 가수 이상은이었다.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그를 처음 본 후 다음 날 교실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우리는 “어제 그거 봤어?”로 말문을 열고, 대걸레를 마이크 삼아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 담”하며 건들거렸다. 왠지 모르게 신명났던 그날, 지루했던 일상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떠들썩했고 내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우리 반 반장이었던 A가 시끄럽게 떠들던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말했다.
“너도 이상은 좋아해? 우리 같이 가요톱텐 갈래?”
기껏해야 조용히 하라는 소리나 들을 줄 알았는데. 반장이 방송국에 가자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그날부터 우리는 단짝이 됐다. 반장이랑 방과 후에 방송국에 들락거리고, 이상은의 공연이 있으면 경기도니 강원도니 따지지 않고 따라다녔다.
팬덤이라는 이름도 낯설었던 그 시절, “딴따라 꽁무니나 쫓는” 여학생으로서의 일상이 시작됐다. 학교랑 집, 기껏해야 학원밖에 모르던 일상에 별세계가 펼쳐진 셈이었다. 공연 끝나면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일이 고되고 때로는 위험했지만 마치 내게 부여된 소명이라도 실천하는 것처럼 비장하게 살았다.

돌이켜보면 당시 이십대에 불과했던 이상은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명언보다 값어치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 “공부 열심히 해!”라고 말해준 유일한 타인. 그 말은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 이어 날라오는 잔소리와 같은 말의 외피를 쓰고 있어도 효과는 강력했다.
그런 그가 읽어보라고 권했던 책이 바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책이라고는 만화책밖에 몰랐던 나는, 문고판을 사 들고 와 읽었다. 문장이 어렵진 않았지만 작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도무지 몰랐다. 그저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현실 세계가 궁금해 매일 그가 살던 아파트 현관에서 기다렸던 나였다. 그가 펼쳐준 세계는 난해했지만 묘한 쾌감을 주었다.

당시 내가 했던 여러 가지 문제 행동 중 학원비를 꿀꺽하는 것도 있었다. 들켜서 혼났을 때 엄마는 나더러 “싹수가 노랗다”며 읽는 책도 저질이라고 했다. 몇 백 페이지 되는 책에서 유일한 야한 장면을 엄마가 무슨 수로 찾아냈는지 신기했지만 나는 악을 썼다. 마치 내 최애가 모욕 당한 것처럼 항변했다.
사춘기 여학생이 으레 그렇듯, 부모가 반대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했던 시절. 엄마가 그렇게 싫어하는 책이라면 기쁘게 읽어주리라 생각했다.
엄마가 죽었는데 여자랑 있었다는 고백이 인상적이었던 까뮈를 읽었고, 알에서 깨어 나오는 새와 인간이 무슨 상관인지 몰라도 헤세를 품고 다녔다. 그 안에는, 미처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욕구와 뒤틀렸던 반항의 이유, 뭣도 모르고 겪었던 불합리함에 대한 명명이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누구든 될 수 있었고, 어떤 일을 해도 현실의 나는 안온했다.
나의 최애가 열어준 새로운 세계가 거기 있었다.

#시작 #독서 #가수이상은 #최애 #루이제린저 #생의한가운데 #인생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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