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시작이 없었다면
공모전의 계절이다. 칼바람이 맹위를 떨치는 겨울 신춘문예가 지나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도 엉겨 붙은 감정의 결정이 맺히기를 기다리는 공모전이 여기저기 열린다.
유려한 문체로 문단을 휘어잡는 젊은 작가들이 늘어나는 동안, 지천명을 앞둔 나는 문학 '학도'로만 몇 년째인지 모른다. 이렇게 기약 없는 일을 해도 되는 걸까, 끊임없이 의심하다가도 그 주저함을 잠재우는 책이 있다.
《나목》.
죽은 고목처럼 보이나, 잎만 떨군 나무.
박완서가 이 책으로 등단했을 때 나이는 한국 나이로 마흔, 아이 다섯을 키우는 가정주부였다. 《나목》은 전쟁 중에 겪은 개인적 체험을 소설로 녹여낸 작품으로, 그를 비로소 '작가'라 불리게 해 주었다. 전쟁의 기억이 가시지 않은 시대에, 아이 다섯을 키우는 마흔의 여성이 그 기억을 끌어와 글로 빚는 시간은 결코 여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잠든 뒤에야 어두운 방에 홀로 엎드려 글을 썼고, 《나목》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가 자기만의 책상을 갖게 된 것은 등단하고 15년이 지난 1985년이었다고 한다. 훗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집안일과 작품의 병행에 이렇게 말했다.
"집안일을 하면서 이런 소모적인 일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나 화가 나기도 했어요. 이 시간에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어요. 늘 그런 갈등과 죄책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글을 썼던 것 같아요. 끝까지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2007.03.08 출처 : 채널예스
삶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고군분투가 느껴진다.
등단 이후, 그의 삶은 평탄하기만 했을까. 내가 박완서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된 것은 20대 초, 성당에서 매주 받아보던 서울주보의 한 꼭지에서였다. 복음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말씀의 이삭'에 실린 그의 글은 실패를 맛 본 젊은이를 숙연하게 했다. 난 매주 주보를 기다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완서는 남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참척의 고통 속에서 그는 절대자를 원망했고, 잠시 글쓰기를 접었다. 그 이후 써 내려간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에는 신을 향한 원망과 원색적인 슬픔이 날것 그대로 담겼다. 그의 다른 글에서 보기 힘든, 데일 듯한 감정이 터져 나온 글이다.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글이었기에, 늘 예상 치를 벗어나지 않던 복음이 다른 온도로 다가왔나보다.
늦게 시작하고도 잠시 접었던 펜을 다시 든 그가 없었다면, 이 기약 없는 일을 나는 조금 더 일찍 내려놓았을 것이다
가을이다. 어쩌면 공모전 당선자 명단에 내 이름은 영영 오르지 않을지 모른다. 최고령 신인 작가의 꿈은 물 건너갈 수도 있고, 앞으로의 삶에 헤어나지 못할 시련이 또 덮칠 수도 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스스로 나목이면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