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탈주 스캔들 (13) - 그 나이 먹고 꿈이 세계평화
새끼 고앙이를 닮은 아이가 맹랑하게 연애 상담을 해주겠다며 제안을 건네는 모습이라니.
이제 갓 열 살을 넘겼을까 싶은 아이를 내려보던 해진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그의 키 반절 정도도 안 되는 자그만 몸집의 묘안이 짐짓 자기만 믿으라는 듯 허리를 쭉 편다. 물끄러미 내려보니 아이가 당당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오래 살진 않았어도 이런 광경을 많이 봤어서 좀 익숙하거든요.”
“너 대체 몇 살이냐?”
“지금 제 나이가 중요해요? 딱 보니까 연애 진도가 생각만큼 잘 안 나가져서 곤란한 것 같으신데요?”
그때 인하가 다시 그들 쪽으로 돌아왔고, 묘안은 천연덕스럽게 인하에게 팔짱을 끼고 통성명했다.
“주 형사님이라고요. 와, 저 살면서 형사 처음 봐요.”
“응, 살면서 어지간하면 안 보는 게 좋은 직업군이야.”
“아니, 주 형사님, 아이에게 벌써부터 되게 좋은 거 가르치시는데?”
그들은 잠시 현 상황을 공유했다. 여기가 어딘지, 누가 이 짓거릴 했는지,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알고 싶어 하는 열의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눈에 띄는 수확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저도 많은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아는 만큼 알려 드릴께요…… 아, 내친 김에 여길 좀 소개시켜 드릴까요?”
묘안의 성화에 이끌려 인하는 조사한 범위였던 방 내부 곳곳을 다시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여느 방들과는 따로 분리되어 구조가 완전히 다른 독립 공간인 선장실도 그랬지만, 조타실 내부가 워낙 널찍하다 보니 내부 한 바퀴 도는 시늉하는 것도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해 뜰 때도 그렇지만 여기에서 보는 전망이 엄청 좋으니까요. 형사님도 한번 둘러 보세요.”
묘안이 화색이 되어 인하의 팔을 붙잡고 방방 뛰었고, 인하는 어색하게 호응했다. 조금 전 둘만 있을 때 연애 상담을 하려던 게 무색한 모습이라서 해진은 슬쩍 인하에게 귀띔했다.
“거, 어린애를 너무 얕보지 마세요.”
“뭐라고?”
“전에도 이 비슷한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 살벌한 곳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이 생각보다 영악하거든요. 아시죠?”
귀띔에 돌아보니 대답 대신 엄지를 치켜세워 묘안 쪽을 한번, 이어 자기 쪽으로 한번 손짓을 하는 해진이었다. 인하는 피식 웃어버렸다.
“영 남 일 같지가 않아?”
“네, 짐작하시는 그대로에요.”
그래서 먼저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선배 입장이 되어 생각하려는 해진의 입장이 이해갔다.
“저, 죄송하지만 잠깐 부탁이 있는데요.”
그때 묘안이 인하의 옷깃을 다시 붙잡았다. 그새 피곤해진 눈빛으로 눈을 비비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저 잠깐만 눈 좀 붙일게요.”
실은 기면증이 있다면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묘안은 금방 잠들었다.
“어…….”
인하는 당황한 채 코를 고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갑판 쪽으로 이어지는 문에 몸을 기댄 해진을 흘끗 보곤,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안아다 방 한쪽 벤치 위에 올려놨다. 묘안은 편히 자리 잡고 잠을 잤다.
역시, 아무리 어른스럽대도 애는 애였다. 낯선 데 뚝 떨어져서 헤매다 의지할 곳을 찾으니 내심 긴장이 풀렸겠지. 인하는 해진을 보며 갑판 쪽으로 나가자고 눈짓했다.
“으음, 안에 아이만 재워놓고 이렇게 형사님이랑 밖에 나와서 바람 쐬고 있으니까 새삼, 단둘이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야, 이 자식아, 멋대로 갓 애 아빠 된 것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인하는 갑판 난간에 몸을 기댄 그녀 옆으로 다가와 달라붙으려는 해진을 슥 피했다.
아까보다 높게 떠오른 해가 선실 안팎 곳곳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방향을 바꾸는 기물 그림자 사이에서 해진이 빙그레 웃었다. 허리까지 오는 상자 끄트머리를 짚고 선 채로.
“난 솔직히 골치 아파. 내가 돌봐야 할 애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밖엔 안 들어.”
“음, 막내 자리를 뺏겼으니 형사님 관심 끌려면 좀 더 애써봐야겠네요. 의욕이 나요.”
차라리 말을 말자. 갑판 쪽을 둘러보던 인하는 밝아진 사위를 둘러보며 뒷머리를 쓰다듬다가, 또 머리카락이 반들거릴 때까지 쓰다듬고 있단 걸 깨닫고 얼른 손을 내렸다. 이게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하는 정형행동이란 걸 얼마 전 해진이 넌지시 귀띔해줘서 알게 됐다.
솔직히 이상한 상황이 더 이상해진 건 맞지. 갑자기 눈 떠보니 이런 거대한 크루즈에 뚝 떨어진 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이젠 애까지 딸리게 된 상황이라고?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요. 덕분에 크루즈 여행도 하고, 우리 형사님이 아이에게 엄청 약하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해진 말마따나 인하는 아이에게 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암만 삼촌이 계기가 되어 입문했어도 어느 정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었다. 어린애가 걱정 없이 환하게 웃으면서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넌 그 나이 먹고 꿈이 세계평화냐고 누가 비웃는대도 좋았다.

갑판 너머 수평선이 울렁거렸다. 갑판 위가 소란스럽거나 말거나 망망대해 위로 거대한 선체가 미끄러지듯 항해하고 있었다.
인하는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기고, 다시 선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 예, 신사숙녀 여러분, 크루즈 여행은 잘 즐기고 계신가요? ]
그때 치직, 하는 노이즈 낀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빔 프로젝터가 켜졌다.
“뭐, 뭐야?”
갑판 위 한쪽에 설치된 기물로부터 몇 번 반짝이며 빛이 쏘아지더니, 인하의 정수리 쪽을 지나 커다란 선실 내부에 영상이 재생됐다.
[ 곧 배가 폭발할 예정입니다. ]
“뭐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