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 날 특별편] 죽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_청소년 자해를 이해한다는 것
[특별편 - 정신건강 이야기]
10월 10일,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오래 고민했다.
청소년 정신건강 칼럼을 쓰면서 언젠가는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해 온 주제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상담실에 찾아왔다.
아이는 커터칼로 손목을 그은 상태였다. 어머니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가 왜 죽으려고 할까요?”
하지만 자해를 한 아이의 대답은 달랐다.
“죽으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 대답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자해를 가까이에서 만나보면, 자해와 자살은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정신건강의학에서는 이를 비자살성 자해라고 부른다.
자살 의도 없이 자신의 몸을 해치는 행동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행동의 목적과 마음의 방향이 다르다는 의미다.
실제로 자해하는 아이들 중에는 “살고 싶어서 자해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다.
견디기 어려운 감정을 잠시라도 흘려보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해를 하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그래도 크게 구분해 보자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밀려올 때, 그 감정을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시도다.
둘째,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자해를 한다. 무감각 상태에서 무엇인가라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다.
셋째, 주변의 관심을 끌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의 바닥에는 “도움이 필요합니다.”라는 공통된 신호가 숨어 있다.
그런데 그 신호를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편견이다.
“관심받으려고 하네.”
“유난 좀 떨지 마.”
이런 말을 들은 청소년들은 점점 더 마음을 숨긴다.
실제로 많은 아이들은 자해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긴소매 옷을 입고, 상처를 가리고, 버티려고 애쓴다. 행동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그 숨은 신호를 놓치기 쉽다.
두 번째는 자해를 발견한 직후의 반응이다.
자해 사실을 알게 된 부모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 울거나, 화내거나, 감시한다.
위험한 행동이니 당연한 반응이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그 순간의 반응이 아이에게는 다른 메시지로 남기도 한다.
“내 마음을 말하면 안 되는구나.”
“다시는 들키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우리는 자해를 단순하게 잘못된 행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맥락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상처의 개수보다, 그 아이가 상처 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해가 안전한 행동이라는 뜻은 아니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로도 감정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지만,
반복될수록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해진다.
상처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자기 몸에 해를 가하는 방식에 점차 익숙해진다.
무엇보다 자해 직후에는 잠시 진정되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깊은 우울감과 자기 혐오가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자해는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는 상처와 같다.
순간은 시원한 것 같지만, 결국 상처는 더 깊어진다.
자해를 발견했을 때,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은 파도처럼 함께 휩쓸리는 것이 아니다.
놀라서 무너지거나, 화내거나, 감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둑처럼 그 자리에 버텨주는 것.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아이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어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자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 놀라고 걱정하는 마음 이전에, 그 행동 뒤에 숨어 있는 도움 요청의 신호를 먼저 볼 수 있기를.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상처가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먼저 안전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정신건강 이야기>
아이 곁에서 파도처럼 휩쓸리지 않아도 됩니다.
둑처럼 그 자리에 버텨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