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사제

설원의 사제
Photo by Colfra / Unsplash

세상의 소음이 멀었다.

희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평원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었다.

온 세상에 그와 나, 단둘만이 존재하는 듯한 적막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건 그 쪽이었다.

“잘 지냈어?”

순간 흩날린 싸라기눈이 발갛게 언 내 귓가를 때리자마자 아릿한 감각이 일었고, 나는 픽 웃었다.

“우리가, 그런 인사나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러게.”

긴 나선을 그리며 지표면을 쓰는 눈 폭풍을 따라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멈췄다. 소리 없이 내게로 향했다.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고 싶진 않았는데.”

일은 일일 뿐이야, 오래전 그와의 잠자리에서 입버릇이던 말이 겹쳐 들린다.

쓸데없는 감상이었다. 나는 흰 배경에 까맣게 점찍힌 정물처럼 멈춘 그를 향해 한발 걸음을 옮겼다. 닿지 않을 만큼 멀었던 그가 가까워졌다.

“흑해자의 삶도 그리 녹록진 않네요.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 편할 줄 알았는데.”

“편해 보였다고. 왜?”

“책임질 게 없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미 그에 대한 건 어지간히 알았다.

“효율적인 방식이에요. 여차할 때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는 이름도 신분도 필요에 따라 만들고 지울 수 있었다. 그가 세상과 맺는 관계란 1회성이었다. 잠깐 몸 섞는 파트너 사이에서의 감정이라고 특별할 리 없다. 몇 년 전 우리의 동거 역시 그에겐 의미 없을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적합한 방식이죠.”

우리에게 삶이란 유료였다. 그것도 제법 값이 비쌌다. 목숨 붙어있는 동안은 내내 우리가 삶을 더 이어가도 될지 말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썩 가혹한 가치 증명이었으나 난 살아남았다. 이 순간까지.

“날 원망해?”

언제나처럼 피폐하고 새카만 그의 동공은 하는 생각이 잘 가늠되질 않았다.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겨누는 나를 보면서도 그는 여전히 표정이랄 게 없었다.

“원망한 적 없어요.”

그의 물음에 곧장 내가 이를 악물고 내 손끝에 콱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당신 덕분에 또 배웠으니까.”

그가 걸친 무채색 정장과 외투 아래, 그의 심장을 향해 겨눠진 총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그의 낯은 조소 같았다.

“거짓말은 여전히 서투네.”

도발당한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비릿하고 들큼한 맛이 입안을 채웠다. 초조해진 나를 응시하는 그는 아주 미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그럼 쏴.”

“입 다물어요.”

“네 자격을 증명해.”

자격 증명. 가치 증명.

“입 좀, 닥치라니까…….”

내가 미성년일 때 이 조직에 입문하며 세례받은 삶의 대전제였다. 내가 몸 담은 조직에서 요원은 언제고 갈아 치워질 수 있는 부품이었다. 맡을 수 있는 임무가 많지 않았고, 선택지도 거부권도 없었다.

”쏴도 돼.“

그는 하나뿐인 제자의 손에 죽는 이런 상황까지도 예상했다며 무덤덤했다.

”널 떠날 때 이 정도는 예상했어.“

그는 고작 예비품일 뿐이던 내게 이름을 줬다. 다만 언젠가 누군가의 스페어로 죽을 뻔한 나를 구하고, 사지에서 건져 숨을 불어넣을 때도 똑같은 표정이었다.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아니, 나는 충분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에게 질척이지 못했다. 충분히 그를 붙잡을 족쇄 노릇을 하지 못했다. 새카만 앞날을 더 이어 가고 싶어 할 만한 욕망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 앞세울 때가 아니잖아.”

그와 내가 소속된 조직은 가장 유능한 요원이자 사냥개, 생체 병기였던 이 남자를 이제는 제거하길 원했다. 그나 나나 줄곧 세상에서 없는 사람 취급이었으나 조직은 한 술 더 떴다. 완전히 도려내길 원했다.

“네게 제안을 했을 텐데.”

얄궂은 건 거기에 조건이 붙었단 거다. 그의 말마따나 이 상황은 내게 기회였다.

그를 죽이면 난 살 수 있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일 처리하는 방식이야 뻔하지. 둘 중 하나에겐 살 기회를 주겠다는 둥 얘기를 했을 거야.”

진상을 짚어내는 말에 입이 굳는다. 단단히 붙어버린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고, 속눈썹에 얼음이 걸렸다. 얼어 붙어가는 눈을 깜빡이자 통증이 일었다.

“망설이지 마.”

난 널 그렇게 가르치진 않았어.

채 소리가 되지 못한 그의 진심이 전해져 온다.

비공식적인 내 첫 스승으로서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이제 내게서 졸업할 때라며, 망설이지 말고 더 나아가라며 무작스레 내 등을 떠미는 그였다.

방아쇠에 걸린 내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시야가 하얗게 튀었다.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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